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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망우리 공원”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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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봄의 훈풍이 좀 일찍 밀려온 탓인가? 이건 정말 드문 일이다. 망우산 능선 언저리에는 온갖 봄꽃들이 일시에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니… 봄의 선봉장 개나리, 진달래가 이미 군락을 이루며 노랑과 분홍색으로 산하를 물들였고 예년 같으면 수줍게 신호만 보냈을 목련과 벚꽃 등도 환한 미소를 던지며 우리들을 맞는다.

 

매달 둘째 토요일은 환경운동연합이 희망하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서울의 문화, 환경 유산 등을 알려주는 뜻깊은 모임이 열리는 날이다. 오늘 4월 11일은 망우리 공원 묘지 일대에서 역사의 흔적과 선인의 숨결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항상 호쾌하고 선이 굵은 설명으로 인기가 만점인 환경운동연합의 김수종 회원이 오늘 따라 더 귀하신 안내자를 일행에게 소개한다. 바로 한 권의 책으로 그동안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이곳 망우리 묘지의 혼령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신 분, 작가 김영식 선생이다. 김영식 작가님은 “그와 나 사이를 걷다”라는 책에서 망우리 묘지에 뼈를 묻은 저명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예술가들의 삶을 소상하게 기술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는 수년 동안 주말마다 망우리의 유폐된 잡초 더미를 헤매기도 했고 고인들 생전의 교우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도서관 책더미에 파묻힌 적도 많았다고 한다. 올해 하반기쯤에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모두 오늘의 안내자 김영식 작가님의 뒤를 따라 망우산 숲길로 들어선다.

 

한참 숨을 헐떡이며 사뭇 걸음이 빠른 선행자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올라가니 이윽고 능선이다. 돌연 눈앞이 활짝 트이면서 장쾌한 정경이 펼쳐진다. 남양주와 양평을 가로지르는 한강 줄기가 눈부신 은빛을 띄며 눈에 들어온다, 한가지 아쉬운 건 뿌연 대기가 시계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완벽한 풍광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다시 한번 환경운동의 당위성을 절감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처음 찾아 뵌 곳은 일제 말기 서양 유화의 선구적 작가 이인성의 묘지이다. 이 놀라운 천재 화가는 그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세상과의 불화를 자처하며 불우한 생애를 마쳤단다. 무엇보다 그럴듯한 학맥이나 인맥 없이 재능 하나만으로 화단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망우리 묘지에 은둔해 있는 사후의 모습이 생전의 그 모습과 딱 어울리는 듯하다. 이인성 묘 바로 밑에는 망우리 묘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지터가 있다. 지금은 도산 선생의 유해가 서울 강남 한복판으로 이장되었지만, 같이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도산의 동지 유상규 선생과 조카 사위의 묘까지 나란히 누워 있는 이곳의 역사성을 어찌 능가할 수 있으랴! 그런데도 도산의 묘지터는 단 한 개의 비석만 남아 있을 뿐이라며 작가는 후대 사람들의 무심함을 탓한다. 절대 공감이다.

 

잠깐 여기서 망우리 공동 묘지의 역사성을 잠깐 훑고 지나가보자. 미아리 공동묘지가 늘어나는 경성부의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자 일제 당국은 1933년경부터 이곳 망우리 일대를 공동 묘역으로 지정한다. 그 후 1973년까지 서울지역에서 생을 마감한 대부분의 유해들은 이곳 망우리 묘지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상여는 향리의 거대한 선산을 찾아갔고 젊은 시절에 요절한 넋들은 홍제동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가 되었지만 일반 서민들의 유혼이 갈 곳은 오직 망우리 공동묘지 한 뼘의 땅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보통 사람들의 묘역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명망가들의 묘역이야 말로 위대한 평범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의미가 깊다 하겠다. 그래서 일까? 평생동안 고락을 같이 했던 최신복 일가 옆에 곱게 안장된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지나, 개업을 거부하고 서민 치료에 평생을 바쳤던 명의 오긍선 선생의 가묘가 정겹게 보인다. 김영식 작가님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가 끄덕거려 졌던 곳으로는 친일파로 말년에 오명을 남긴 박희도 목사의 비문과 조선의 민예 수집가로 한국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는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비문이다. 박희도는 처음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존경을 받은 목사였다. 그러나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이 허약한 역사의식으로 인해 그는 친일 행각에 들어섰고 끝내 회오의 세월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이에 비해 아사카와 다쿠미는 처음에는 식민지의 산림 관료로 이 땅에 들어왔지만 나중에는 늘 조선 옷을 입고 조선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으로 존경 받고 살다가 이 땅에 묻혔다. 그의 묘역 앞에는 인근 학교 학생들과 각종 단체에서 갖다 놓은 꽃묶음이 늘 가득하다니 이 땅에서 쌓은 덕업 탓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가있고 심신이 노곤해진다, 대부분의 묘가 이장되거나 기한이 지나 산골되었지만 아직도 8,000여개의 묘지가 이곳 망우산에 누워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오세창, 민족사학자 문일평, 낙엽 따라 가버린 가수 차중락의 묘소 등은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소에는 부인의 묘가 같이 다정하게 누워있어 이채롭게 보였다. 비문에 부인의 묘가 “在右”라고 써있다. 부인 묘가 만해 선생 오른쪽에 누워 있다는 뜻인데 많은 참배객들이 자기 자리에서 오른쪽인 줄로 착각하고 엉뚱한 묘에다 절을 한다는 작가님의 설명을 듣고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희생당한 당대의 풍운아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는 가장 숙연함을 안겨 주는 곳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사형만으로도 부족해서 그의 비문 마저도 새길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글씨도 새기지 않은 그 검은 비석이 어두운 역사를 엄정하게 증언하는 듯 보인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나 할까? 서울쪽 산등성이로 내려오면서 화가 이중섭의 묘소를 들려본다. 말년에 이중섭이 겪었던 가난과 병고,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던 어느 후배의 가슴 아픈 사연까지 작가님의 상세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이중섭의 묘소 옆에는 견고한 소나무 한그루가 멋진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한 둔덕을 또 내려가니 50년대 폐허의 거리에서 낭만을 노래했던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묘소가 있다. 마침 박인환 작사, 이진섭 작곡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작가님이 틀어주신다. 이 곡을 들으면서 명동의 낭만과 김수영, 이봉구 등 당대 문인들의 삶을 반추해 본다. 사실 진정한 시인이라면 그의 삶조차 시의 일부가 되는 것 아닐까? 술, 노래, 사랑 심지어는 그의 치기마저…

 

그나저나 망우리 공동묘지, 이름도 참 어울리는 곳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음택을 동구릉에 정하고는 이곳 고개에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 망우리였다고 한다. 이곳에 묻힌 많은 혼령 하나하나가 다 그 나름의 역사적 흔적을 안고 잠들어 있으니 어느 한 곳을 소홀히 여길 수 있을까? 오늘 이 역사적 공간에서 삶의 기억과 의미를 일깨울 수 있었으니 이 행사를 열어 주신 환경운동연합과 김수종 회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각종 사진과 자료, 음악까지 인용하면서 죽은 자들의 거처와 마음의 가교를 잇게 해주신 작가 김영식 선생님에게도 무한한 치하를 드린다.

 

2015년 4월 13일 백택현 (환경운동연합 회원, 교사)

 

강동송파환경연합

“생명” 그 두근거림을 지키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 입니다. -강동송파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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